2008-2010

어나벨

choheeher 2010. 9. 8. 23:30

「스무 살이 되기 전의 날들」 김향숙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신경숙

 

내가 좋아하는 문체, 느낌의 소설들.. 김향숙의 소설을 만난 건 고2 겨울방학 즈음, 친구와 수능이 끝난 고등학교 3학년 선배들의 교실을 습격한 날부터였다. 난장판인 교실, 열려있는 사물함에 널브러진 책들 사이로 나는 스무 살이 되기 전의 날들을 발견했다. 꽤 오래되었는지 빛에 바래 누우런 색이 되어버린 책의 속지. 나는 언젠가 도서관의 고서가에서 맡았던 오래된 책의 향이 코끝에 와닿음을 느끼면서 맨 앞 장을 펼쳐보았다.

 

미희에게

홍역과도 같았을까

잘 견디길 바란다.

1994.1.16 미선


사람에게는 아홉 수라는 것이 있다고.

디딜 언덕을 마련하기 위해

언덕을 넘어야 하는...

 

첫 페이지에 쓰여진 이 글귀가 글이라는 것에는 형편없는 문외한이었던 내 눈에도, 얼마나 멋져 보였는지 모른다.

잘 견디기 바란다는 그 말은...

마치 미선이란 친구가 나한테 입속말로 나즈막히 속삭여주고 있는것처럼 내 마음에 물결치듯 잔잔하게 와닿아버렸다.

이 책도 내 것으로 챙겨가야지.

하지만 누군가 소중히 생각하는 책일지도 모르는데, 혹시라도 이 책의 주인이 돌아왔을 때 책이 없어진 걸 발견하게 된다면..

그 누군가가 느낄 아끼던 물건을 잃어버렸을 때의 상실감을 걱정하면서도, 더 이상 아무도 돌아오지 않을것만같은 난장판인 교실 속에서 오히려 이 책이 새로운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내 식대로 치부해버리고서는 다른 건져낸 참고서들과 함께 나의 교실로 챙겨 가져왔다.

그리고 고3 내내 책상 서랍에 넣어두고선 힘든 순간이 올 때마다, 언젠가 이 책을 선물받았던 미희가 처음 펼쳤을 땐 새하얬을 책장 종이를, 한 장 한 장 넘겼을 미희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아껴가며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처음으로 읽어 본 신경숙의 신작 소설「어나벨…」

이번에 교양으로 듣게 된 서양 근현대사의 이해 교수님은 첫 수업 시간에, 책 읽기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대학생 시절의 배움은 앞으로의 삶에 있어 끝없는 자양분이 될 거라던가 독서가 다만 지식의 재료 공급이라면 깨달음은 사색에서 온다던가 하는 말들을 하셨다.

그 중에서도 쉽게 쓴 글은 읽기 어렵고 어렵게 쓴 글은 쉽게 읽힌다는 말은 한동안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는데, 「어나벨…」을 읽으면서 작가가 이 책 한 권을 써내려가는 동안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고 이 다듬어진 한 문장을 쓰는데에 얼마나 오랜 정성을 들였을까 하는 생각을 끊임없이 했다.

신경숙 작가의 문체는 스무 살이 되기 전의 날들과 어디엔가 닮은 구석이 있는듯한 느낌이 들어서 고3 시절이 투영된 내 모습을 생각하게 한다.

오랫동안 잊고 지낸 그 때의 기억들이 아주 조금 반갑기도 하고 졸업하는 순간부터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을거라던 싫기도 한..

어렴풋한 감정들이 엉켜있는 실처럼 뒤섞여버린다.

나는 고등학교 문학 시간에라곤 수업을 열심히 듣기보다는 언어영역 문제를 풀어내기에만 바빴던, 스스로 책을 읽기 시작한 지도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인지라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이렇게 말로 정리해내기가 쉽지만은 않지만 무언가 그냥 흘려보내기보다는 붙들어 놓고 싶은 젊은 날의 나의 행적과 사념들을 조금씩 적어보기로 한다.

 

오늘 저녁 집에서 은정이랑 찜닭을 시켜먹고 드러누워 재잘대면서 친구에 대해 얘기했다.

사랑. 친구. 그런 것들...

아직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확실한 정체성을 가져보진 못했지만 이런 나도 나, 저런 나도 나 살다보면 모든게 나의 연속선상이라는 사실과 함께...

보고 듣고 읽고 쓰는 삶의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나를 여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