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희의 이야기

피아노할머니 이야기

choheeher 2014. 1. 21. 22:00

이전에 애써 쓴 글이 잘못 누른 터치 한번으로 사라졌다. 다시 쓰는 글은 처음만 못한 법이지만 지금 남기지 않으면 안될 나의 기억들을 다시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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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우리 가족은 매주 온양에 갔었다. 친가 외가 다 온양에 있으니까 토요일에 친가에 먼저 들렀다가 외가에서 하룻밤 자구 일요일에 대전으루 돌아오는 식이었다. 어린 내가 친할머니와 외할머니를 헷갈리게 부르자 울엄마는 나에게 친할머니는 선문리할머니 외할머니는 피아노할머니라고 부르라고 했다. 이유는 그냥 친할머니네는 선문리에 있으니까 외할머니 집에는 피아노가 여러 대 있으니까였다.


친가에서보다 외가에서 귀한 손녀 대접을 받았는지 나는 외가가 참 좋았다. 외할머니 따라서 온양 동네 온천에두 자주 가고 했다. 마음씨 좋았던 우리 할머니는 정도 많고 순하고 정갈한 충청도 사람이었다. 울엄마 말로는 주변 할머니들이 하나둘씩 다 파마머리를 할 때두 피아노할머니는 여전히 기른 머리에 동백기름 짜악 윤기나게 발라 올려서 비녀로 콕 찌르구 댕겼다고 한다. 그럼서 원제 왔디야 이이 그려 알겄슈 아녀유 하는 지극히 충청도다운 사투리를 구사하셨다.


할머니는 어린 나를 안구 매만지구 뽀뽀하구 자장노래를 불러주었다. 할머니에게 안기면은 알싸한 파스냄새가 났다. 나는 그런 우리 할머니 품이 나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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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을 앞둔 어느날 할머니는 갑자기 쓰러지셨다. 우리엄마는 병원이고 어디고 이모들이랑 분주하게 여기저기를 다니는 것 같았지만 한번도 날 데려가지 않았다. 할머니가 서울서 한동안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그 뒤로 아들네가 모셨다고만 들어서 알았다. 1남 5녀 중 하나뿐인 아들. 외삼촌네 집은 서울 은마아파트였다.


중학교때 처음으루 외삼촌네에 할머니를 보러 갔다. 할머니는 더 이상 온양에서 보았던 우리 피아노할머니의 모습이 아니었다. 귀가 안들려서 말도 잘 못알아듣고 무릎이 아파서 잘 걷지도 못하고 방석에 앉아서 방바닥을 엉덩이로 쓸고 댕겼다. 할머니가 사람을 몰라보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성냥갑처럼 나열된 답답한 복도식 아파트에서, 할머니의 기억은 점점 더 사라져갔다.

몇 번이나 집을 나섰다가 길을 잃고, 거리에서 발견되거나 경찰서에서 데려오는 일이 생겼다. 언제는 어느 피자집 앞에 하루종일 앉아있다가, 영업에 방해되는 할머니를 다독여서 집으로 돌려보내려는 주인네로부터 주머니에 사탕을 한움큼 얻어오기도 했다.

외숙모는 치매 걸린 시어머니를 모시는게 응당 괴로웠을 것이다. 결국 할머니는 아들네의 결정으로 강남구의 한 노인복지센터에 맡겨졌다.

할머니가 기억을 잃어가는 사이 나도 중고등학교 시기에 접어들면서 할머니의 존재를 잊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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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3학년이 되어서야 나는 엄마한테 물어서 처음으로 할머니가 있는 강남구 노인복지센터를 찾아갔다. 엄마는 이모들이랑 두세달에 한번씩 할머니를 보러 갔었지만 나는 따라간 적이 한번도 없었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어쩌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었다. 나는 학기중에 아예 사회봉사과목 수강신청을 하여서 그곳으로 배정받고 일주일에 한 번 봉사를 나갔다.


성인이 되고 본 할머니의 모습은 더욱 낯설었다. 할머니는 울엄마보고 댁은 누구슈라고 물어볼 정도로 모든 기억을 잃은 상태였다.

나는 그곳에서 처음으로 할머니 양말도 신겨드리고 밥도 먹여드렸다. 뜨거운 죽을 후후 불어 한 입 두 입 그렇게 숟가락을 할머니 입에 넣으며 참 속상하였다. 휠체어에 앉아서 먹기만 해서 그런지 할머니 몸은 말랐는데 배만 불룩하고, 나를 쳐다보는 할머니의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그리고 쉴새없이 입을 오물오물 거리고 휠체어에서 일어서려는 시늉을 하는 등의 반복적인 행동을 하였다.

나는 우리 할머니 바람이라도 쐬어드리고 싶었지만 간병인 아줌마들에게 그러고 싶다고 말을 내뱉지 못했다. 잠깐이라도 휠체어 밀고 나가서 한바퀴 돌고 올 수 있는 것이었는데 그러지도 못했다. 어리숙한 나는 할머니 앞에서 어찌해야 할 지 몰라서 데면데면 말없이 곁에 있다 돌아오는게 전부였다.


정기적인 봉사활동이 끝난 이후에 오케스트라, 과대표 한다고 바쁘고 또 바로 학원에 다니고 한참을 못간 채로 지내다가

2011년초 나는 학원을 마치고 돌아온 집구석에서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는 엄마의 전화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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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노인복지센터로부터 할머니가 밤사이에 돌아가셨노라고, 그렇게 연락을 받았을 뿐이었다.

빈소는 고터 성모병원에 차려졌다. 당시 나는 에클라트에 살고 있었다. 애석하게도 할머니가 그렇게 예뻐하던 손녀는 장례식장에서만 잠깐 슬프고 말았다.

아니, 나는 슬퍼하는 우리 엄마를 바라보는게 더 가슴 미어지기만 했다.

사람들이 다녀가며 호상이라고들 했다. 아흔 넘게 사셨고 아픈데 없이 돌아가셨다고. 큰 고통 없이...

모두들 치매노인을 부양했던 자식들의 고통만을 헤아릴뿐 당사자가 표현하지 못한 고통에는 관심이 없었다.

어리석은 나는 그저 사람들 말마따나 우리 할머니는 참 고통없이 돌아가셨구나, 했다.

그저 동생들과 고터와 남터를 왔다갔다하며, 부모님 없는 에클라트에서 철없이 일주일을 보낼 뿐이었다.


*

후회가 된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할머니는 오랫동안 나의 현재에 계셨다. 2011년까지의 시간을 공유했는데도, 나는 대체 무엇에 정신이 팔려 그렇게 할머니를 잊고 지냈는지. 왜 진작에 찾아가지 못했는지 후회가 된다.

우리 할머니가 정말 그런 곳에서 홀로 지내다 가셔야만 했을까...

아무리 기억을 잃고 말하는 법까지 잊어버렸대도,

누워있거나 휠체어에 앉아있는 일상은 얼마나 답답했을까...

타인들로 둘러싸인 그 공간에서 영문도 모른채 외로운 감정을 느끼시지 않았을까...

이제사 그런 뉘우침을 한다.


할머니 드리려고 샀던 핸드크림은 여전히 그대로 내 거울 앞에 놓여 있는데. 간병인 아줌마들이 가져가 버릴까봐, "송희섭 할머니" 매직으로 이름도 써서 준비했었는데...

나 이제 많이 컸는데...

할머니가 못알아들어도 그냥 사근사근 얘기도 하고,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초점없는 할머니 눈을 맞추고, 어린 나를 안아주던 할머니의 손을 어루만지고 기도해드릴 수 있는데...


나는 외로웠을 할머니를 따뜻하게 안아드리지도 못했어

할머니 미안해

보고싶어